곪을 대로 곪은 게 드디어 터졌구나.
언니가 퇴근하면서 2011년 6월 8일자 경향신문을 가져왔다. 신문 1면에는 '대학생들, 깨어나다'라는 헤드라인과 함께 동맹휴업을 추진하는 서울 소재 사립대 총학생회장단의 사진이 실려있었다. 사진 속 학생들의 얼굴에는 의지가 가득 차 있었다. 그런 반면 그 기사를 읽고 있는 지금의 나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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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겨울, 3년 내 준비했던 수능 시험을 허무하게 치룬 내가 한 일은 아르바이트 자리를 찾는 것이었다. 편의점과 고깃집 아르바이트를 병행하면서 내 손에 쥐어진 돈은 한 달에 80만원 남짓이었다. 그래도 대학 들어가기 전에 3달 빡시게 일하면 대학 가서는 맘 편하게 대학생활을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열심히 일했다. 2월이 되고 합격자 여부를 확인하는 동시에 등록금 고지서를 인터넷으로 받았다. 사실 나의 1지망은 현재 내가 다니는 학교가 아니었다. 부담이 좀 있더라도 사립대에 들어가고 싶었던 나다. 하지만 고지된 등록금 표를 보고서 그 마음을 고이 접어 넣었다. 그렇게 할 수 밖에 없게 만드는 등록금이었다. 울며 겨자먹기로 인천대 09학번으로 입학하게 되었는데 인천에서의 생활도 말이 아니었다. 기숙사 건립이 예정보다 늦어진 까닭에 나는 학교 근처 고시원에서 생활했다. OT에 참석하고 집에 도착하자마자 한 일은 또 아르바이트 찾는 일이었다. 매달 내야하는 고시원비며 식비, 생활비를 충당할 돈이 없었기 때문이다.
서울이나 수도권 및 객지에서 생활하는 지방 출신 학생들은 모두 나처럼 생활했을 것이 분명하다. 오전에는 강의 듣고 부랴부랴 시간 맞춰서 돈가스집에 출근하고. 시험기간에는 공부할 시간이 없어서 잠자는 시간을 쪼개서 공부했다. 수업 마치고 알바 갔다가 퇴근해서 집에서 씻고 나와서 막차타고 학교 도서관가서 눈비비면서 벼락치기로 공부해서 다음날 1교시 과목 시험치고.. 지금은 친구들에게도 무용담처럼 웃으면서 이야기하지만 그때는 그게 너무 싫었다. 성적이 안좋게 나오면 평소에 공부 안 한 것은 생각않고 신세타령 하고 있는 내가 무척이나 싫었다. 1년을 휴학했다. 집안 사정도 있었지만 휴학은 순전히 내 의지로 결정했다. 카페에서 서빙도 해보고 어학원 보조도 해보고 호프집 서빙도 하면서 신나게 돈벌었다. 그러기를 1년, 돈 벌 생각에만 급급했던 나는 다시 학교로 돌아갈 준비가 되어있지 않았다. 막상 학교로 돌아가려니 두려웠다. 휴학을 1년 연장한 나는 여전히 아르바이트로 하루를 또 한달을 살아가고 있다.
나의 꿈은 이번 가을에는 꼭 캠퍼스로 돌아가는 것이다. 물론 꼭 그렇게 할 것이지만 나는 너무 두렵다. 학교로 돌아가서 뒤쳐질까봐 두려운 것이 아니라 1년 뒤 그리고 그 후로도 내가 아르바이트로 하루를 살아가고 있을까봐 두렵다. 나와 같은 처지의 학생들은 학업과 돈벌이의 기로에서 많은 고민을 하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나는 학업으로 발길을 옮겼다. 심사숙고 끝에 결정한 길이다. 이 길에 지름길이 있는지, 앞으로 내리막이 나올지 오르막이 나올지는 아직 모르겠지만 그저 나의 발길이 목적지까지 다다를 수 있기를 바랄 뿐이다. 반값 등록금이 실현된다면 나의 등에 짊어진 짐이 반으로 줄어 한결 가벼워진 발걸음으로 길을 떠날 수 있을 터인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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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NS를 통해 이곳 저곳 퍼지고 있는 현 정부의 반값등록금 공약에 대해서 가타부타 말이 많다. 대통령이 공약한 것이 아니라 한나라당의 추진 정책 중의 하나인데 공약의 이행을 무리하게 요구하지 말라는 비난의 여론도 더러 있었다. 아무렴 어떤가. 선거 공약이었든 아니었든 지금 상황에서는 실현이 중요하다. 반값등록금이 타당하다고 여기고 모두가 반값등록금의 실현을 원하고 있는데 이행 못할 이유가 어디있는가? 내가 지금 당장 혜택을 받지 못하더라도 괜찮다. 지금부터 준비해서 단계적으로라도 등록금이 인하되었으면 좋겠다. 60 ~ 70년 경제 성장을 이끌었던 새마을 운동 세대, 80 ~ 90년 학생운동과 민주화 투쟁에 앞장섰던 386세대가 일구어 놓은 사회를 우리 세대가 이어 받은 것처럼 우리를 이어받을 후손들이 혜택을 누릴 수 있도록 말이다.